상담 기록 · 1 / 9
Session 1 — 이새
호흡을 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사이의 어딘가
—너무 짧아 …말로는 붙잡을 수 없고,
그러나 너무 깊어… 기억보다 더 오래 머무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 이 공간에 와 있었다.
그게 꿈이었는지,
기억이었는지,
아니면 죽음에 가까운 몽상 같은 건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는 앉아 있었고, 누군가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어서 오세요. 이새님.”
부드럽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책을 넘기는 소리보다 작고,
흙 위를 맨발로 걷는 소리보다 조용한,
그런 목소리.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그녀는 손짓으로 조용히 그를 앉혔다.
“저는 하나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묻지 않았던,
당신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말이에요.”
이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말한 말들 중 몇 마디가
귓속에 길게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무언가 안쪽에서 멈칫했다.
“이름은… 하나라고 했소?”
“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요?”
“그건 당신이 아셔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모르오.”
“정말로 모르시나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녀는 적의도 없었고, 설득도 없었다.
그저, 귀 기울이려는 사람의 자세였다.
이새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고,
창밖의 소리가 들려왔다—새소리도, 바람도 아니었다.
피리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를 알았다.
들판에서,
양을 몰며
작은 피리를 불던
그 아이의 소리였다.
“아버지, 나 여기 있었어요.”
“그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이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아주 천천히 쥐기 시작했다.
그 아이.
그 이름.
그 피리 소리.
오랫동안 기억 밖에 밀어두었던
어느 한 생명이,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마음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윗… 그 아이에 대해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는 그렇게 물었고,
이새는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턱을 다물고
그는 앉아 있었다.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나 그녀는 기다렸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던 그를
그녀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별다른 아이는 아니었소.”
“별다르지 않았다.”
“작고… 조용했고… 피리를 잘 불었소.
노래를 좋아했고,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
“그래서 더 눈에 띄지 않았을까요?”
“…그랬겠지.
그 집안이… 크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형들이 다 앞서 있었고…”
그는 말을 흐리며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그 아이는…
늘,
뭔가를 혼자서 하고 있었소.”
“그걸 보고 어떻게 느끼셨어요?”
“아무 감정도 없었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그냥 그런 거요.
아이 하나쯤은 그런 법이오.”
“정말 그렇게 느끼셨나요,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셨나요?”
이새는 순간 눈을 떴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 아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소.”
“왜요?”
“…그 애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분명하게 느껴졌소.”
“어떤 사람인데요?”
“…보지 않은 사람.
보아야 할 사람을,
보지 않은 사람.”
그는 그 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의자 밑으로 감춰둔 두 발은
앞뒤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나세요?”
“…아버지.”
“그 말,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나요?”
“…”
이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그게 그렇게 오래된 소리일 줄은…
몰랐소.”
상담실은 고요했다.
창밖에서 들리던 피리 소리는 멎었고,
지금은 단지
이새의 안에 있던 침묵이
조금씩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종이에 무언가를 조용히 적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 아이가 지금
당신 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시겠어요?”
“……”
“그 아이는 지금,
그저 서 있을 뿐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이새는 눈을 감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상담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잠시 더 적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새님,
지금부터 제가 몇 마디 말씀을 드릴 거예요.
이건 ‘따라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더 하기 싫어지시겠죠.
그냥…
그 말을 소리 내어 말해보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살짝 젖혔다.
“말해보라는 거요?”
“네.
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이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그 말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건…
무슨 말이요.”
그녀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 말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되뇌었다.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따라 하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의미를 모르고 따라하셔도 괜찮아요.
가끔 마음이 먼저 아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천천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그 말이 끝나고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말이 공기 중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빠져나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버린 듯한 공기.
“좋습니다.”
하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이 말을 한 번 더 말해보실래요?”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내 아들이었다.”
“그건…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럼 제가 먼저 말하고,
그냥… 같이 말해보시는 거예요.
어차피 아무도 안 듣고 계시니까요.
그 아이만 빼고는요.”
그는 작게 웃었다.
아주 작게,
이야기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세한 곡선이
입가에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말과 겹쳐지듯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내 아들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그는 입을 다물었고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은 진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 아이는…
늘,
형들 사이에서 묻혀 있었소.
작고, 약하고…
어미도…
그 애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소.
아니,
정확히는…
그 애가 있다는 게 좀…
부담스러웠을 거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웃기 위해 노력한 웃음 같았다.
“…사실은,
그 애를 내보내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했소.
들판에서 양이나 보라고.
그러면 조용해지고,
식구들끼리도 편해지니까.”
“그렇게 결정하신 거군요.”
“…결정도 아니었소.
그냥 그렇게 굴러갔고,
난 말리지 않았고,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 애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던 거요.”
“보내신 게 아니고요?”
“…나는…
그 애를 지키지 않았소.”
“이새님,
하나만 더 따라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말해보시오.”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너를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입술을 세 번 움직이고
마지막에야 따라했다.
“…나는 너를…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말을 하자,
그의 어깨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았다.
숨이 나갔고,
그는 처음으로
자기 호흡이 가볍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애는…
내가 지키지 않았어도,
살아 있었소.
그 들판에서.
그 피리 소리로.
그 아이는 혼자였지만,
뭔가가 있었소.
나는…
그걸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그건…
내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말이 아닌 다른 것이 맺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울음이 아니라,
“자리”였다.
말해지지 않았던 것이
비로소 놓이는 그 자리.
그녀는 마지막으로 종이를 접었다.
“이새님.
오늘 당신이 하신 말들,
그 아이는 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안에
그의 자리는 마련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문을 여는 동안,
그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