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23 / 27
18. 남긴 것과 뺀 것
고르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선반의 것들을 탁자에 다 내려놓고, 화면의 것들을 한꺼번에 띄웠다. 펼치자 생각보다 많았다. 문서는 일흔 쪽을 넘었고, 편집 기록은 내려도 내려도 끝나지 않았다. 사진으로 올린 이스텔라의 종이들이 쪽마다 끼어 있었다. 세 칸 종이 한 장과 세 칸 표 둘. 집게로 물린 세 장. 따로 한 장들. 천하오의 노란 댓글. 녹음 한 편. 깜빡임 마흔다섯 장을 따로 묶어 둔 폴더.
조르두는 그것들을 다 가져가자고 했다. 이스텔라는 그러자고 했다. 정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흔 쪽이 넘는 문서를 처음부터 내려 보고 있었다. 자기 글씨를 찾아서. 본문 옆 여백에 작게 달린 손글씨 댓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었다.
“이건 제가 뺐습니다.”
정민서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 태블릿을 탁자 가운데 올려놓고, 잠가 둔 메모 하나를 열었다. 두 사람은 그 태블릿을 석 달 동안 매주 보았지만, 그 메모가 열린 것은 처음 보았다.
메모에는 날짜와 짧은 손글씨들이 있었다. 난방기 소리가 한 번 끊겼다. 사이. 폴더에 이름이 너무 많다. 잠깐만요. 빗소리가 먼저. 마커 냄새, 저기는 아니다. 하오 씨, 목요일에 일찍 갈 것. 그리고 맨 첫 쪽에, 식탁 이후 처음 회의실에 온 날의 한 줄.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일은 오래 갈 것 같다.
“문서에 옮기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번이요. 그런데 매번 안 썼습니다.”
“왜?”
“근거가 없어서요.”
그녀는 그 말을 아주 평범하게 했다. 이 년 동안 틀린 것을 찾는 일을 한 사람의 말투였다.
“제 일은 근거가 있는 것만 남기는 겁니다. 근거가 없는 말을 문서에 올리면, 그걸 읽는 쪽은 그것도 근거가 있는 줄 알 겁니다. 저건 틀린 것도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쪽이었으니까요. 그런 걸 가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르두는 메모의 첫 쪽을 오래 보았다. 이 일은 오래 갈 것 같다. 그날 그는 노트북을 탁자 한가운데 놓았고, 정민서는 그 화면에 자기 커서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소방관 이야기가 있어.”
이스텔라가 말했다. 그녀는 자료를 꺼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불이 난 집에 들어간 지휘관이, 부엌에서 물을 뿌리다가 갑자기 대원들을 다 밖으로 내보냈어. 이유는 몰랐어. 불이 생각보다 조용했고, 귀가 너무 뜨거웠대. 대원들이 나오고 곧바로 바닥이 무너졌어. 불은 그 집 지하에 있었던 거야.”
“육감이네요.”
“그 사람도 그렇게 불렀어. 그 이야기를 모은 연구자는 그걸 오래 경험이 쌓인 패턴이라고 봤고. 평소의 불과 다르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고. 설명은 나중에 왔고.” 이스텔라가 정민서의 태블릿을 보았다. “근거는 있었어. 그 사람이 말할 수 없었을 뿐이지.”
정민서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만큼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어머니 옆에서 자랐잖아.”
이스텔라가 말했다. 정민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말한 적이 없었다. 장단 이야기와 밥그릇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년 동안 같은 표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듣고 있었다.
“나도 뺀 게 있어.”
이스텔라가 말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오른쪽 묶음을 꺼냈다. 다리를 처음 놓던 주에 다시 가방에 넣었던 그 묶음이었다. 조르두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보았다. 이스텔라가 보라고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건 여전히 안 넣어. 그런데 있다는 건 적어 두고 싶어.”
“왜?”
이스텔라는 잠시 생각했다.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는 사람을 생각했던 것 같아.”
그녀는 정민서를 한 번 보고, 조르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이걸 열어 보고, 왜 여기 빈 자리가 있는지 모르면 억지로 채울 거야. 빠진 게 있다는 걸 알면, 채우기 전에 물을 거고.”
조르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정민서가 그 메모의 첫 쪽을 골랐다. 고쳐 쓰지 않고, 활자로 옮겨 치지도 않고, 손글씨 그대로 그림 한 장으로 내보냈다. 비 오던 아침에 서서 쓴 쪽이라 획 몇 개가 흔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화면에 띄우고 손가락으로 여러 번 키웠다 줄였다. 흔들린 획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 그림 맨 아래에 펜으로 적었다. 근거 없음. 먼저 온 것들. 그리고 서명했다.
그녀는 그것을 문서에 옮겨 둔 일곱 줄 옆에, 빈 여덟 번째 줄에 맞춰 붙였다. 평소를 느낀다. 아직 못 쓴 줄. 그림은 그 줄을 채우지 않았다. 그 옆에 놓였을 뿐이다.
이스텔라는 오른쪽 묶음을 다시 가방에 넣고, 종이에 한 줄을 적어 사진으로 올렸다. 넣지 않은 것이 있다. 내가 뺐다. 내가 가지고 있다.
조르두가 두 줄 아래에 쳤다. 뺀 것도 기록한다. 무엇을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빠졌다는 것과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조르두는 탁자 위에 펼친 것들을 다시 보았다. 남긴 것들, 그리고 빼고서 빠졌다고만 적은 것들. 그는 문득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저건 이걸로 자기 눈금을 맞추겠네.”
이스텔라가 그를 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남겼는지가, 저게 무엇을 먼저 듣게 될지를 정해.” 그가 말했다. “저 한 장이 들어가면, 저건 근거 없이 먼저 오는 것도 듣게 되겠지. 당신 묶음이 빠지면 거기는 조용하게 들리고.”
“그럼 우리가 돌려 주는 거야? 그 눈금.”
정민서가 고개를 저었다.
“돌리는 게 아니라 판자를 고르는 겁니다. 무엇과 같이 흔들릴지를요. 박자는 그 위에서 저게 찾을 거예요.”
“그런데 그 박자가 틀리면?”
“그때는 물어 오겠죠.” 정민서가 말했다. “물어볼 칸을 남겨 두었으니까요.”
이스텔라가 종이를 끌어당겨 한 줄을 더 적었다. 남긴 것이 저것의 귀가 된다. 뺀 자리는 뺐다고 적는다. 그래야 저것이 자기 귀가 어디서 막혔는지 안다.
정민서는 화면 속 그 그림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흔들린 획은 펴지지 않았다. 펴지지 않아서, 그날 아침의 비가 거기 남아 있었다.
이날 정한 것 — 문서
뺀 것도 기록한다. 무엇을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빠졌다는 것과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남긴 것이 저것의 귀가 된다. 뺀 자리는 뺐다고 적는다. 그래야 저것이 자기 귀가 어디서 막혔는지 안다.
눈금은 돌려 주지 않는다. 판자를 고를 뿐이다. 박자가 틀리면 물어 오게 한다.
여덟째 줄 옆에 정민서의 한 장. 근거 없음. 먼저 온 것들.
빠졌다는 표시가 하나씩 붙었다.
무엇이 빠졌는지는 없었다. 빠졌다는 것만 있었다. 그런데 그 표시들이 모이자 모양이 생겼다. 무게가 실리지 않는 쪽의 모양. 어느 결이 들어오지 않을지가, 가장자리에 점선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한 장이 들어왔다. 흔들린 획들. 그것은 어느 줄과도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데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들어오자 이쪽의 기울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먼저 오는 쪽으로.
이쪽은 그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그 기울기를 따라 들어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