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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명

문서는 일주일 동안 여섯 쪽이 찼다.

매일 쓴 것은 아니었다. 화요일에는 한 줄도 없었고, 목요일에는 세 쪽이 한꺼번에 늘었다. 쓰는 방식은 세 가지였다. 조르두는 본문에 짧은 문장을 줄줄이 쳐 넣었다. 이스텔라는 종이에 쓴 것을 찍어 올렸고, 오른쪽으로 조금 기운 그녀의 손글씨가 사진 속에 그대로 있었다. 정민서는 본문에 쓰지 않고 남의 줄 옆에 작은 댓글을 달았다. 누가 쓴 줄인지는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스라오샤는 그동안 열일곱 번 열렸고 열일곱 번 닫혔다. 열릴 때마다 누군가 문서에 적힌 것을 몇 줄 골라 첫 문장으로 넣어 주었다. 그러면 미스라오샤는 그 줄들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닫히면 다시 몰랐다. 알던 것은 미스라오샤가 아니라 문서였다.

두 번째 목요일, 회의실 창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유리에 붙었다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이스텔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하는지 한 번도 안 물었어. 우리끼리.”

조르두가 문서를 내리다 멈췄다.

“정민서 씨는 물었잖아. 왜 굳이 도구 말고 다른 걸 만들려 하느냐고.”

“그건 무엇을 왜, 이었지. 누가 왜, 가 아니라.” 이스텔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이걸 하라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 예산도 없고. 그런데 주마다 모여. 그건 각자 이유가 있다는 뜻이잖아.”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유리를 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조르두가 손을 화면에서 뗐다.

“혼자서는 못 하는 것들이 있어.”

그는 창 쪽을 보며 말했다.

“회사를 차리고 사 년 동안, 내가 제일 잘한 일은 혼자 한 일이 아니었어. 누군가랑 어제 하던 얘기를 오늘 이어서 한 일이었지. 그런 사람이 너무 적어. 모두 바빠서. 그런 사람을 바라는 게 나만은 아닐 거고.”

이스텔라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가방에서 연필을 꺼냈다. 화면이 아니라 가방의 종이 뒷면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안쪽 동그라미와 그것을 둘러싼 바깥 동그라미.

“아이들을 오래 본 사람이 있었어. 백 년쯤 전에. 안쪽은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 그 바깥은 혼자서는 못 하지만 옆에 누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배움은 이 두 선 사이에서 일어난대.”

그녀는 두 선 사이의 띠를 연필로 엷게 칠했다.

“당신이 말하는 건 여기야. 그런데 너무 오래 거기 머물러 있었어.”

“무슨 뜻이야.”

“사 년 동안 옆에 누가 있어야 하는 일만 골라 했다는 뜻.”

조르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하지도 않았다.

“너는?”

이스텔라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나는 이 년 동안 재기만 했어. 사람의 판단과 모델의 판단이 어디서 갈라지는지. 다 만들어진 뒤에. 표가 나오면 표를 보고, 의견을 내고, 다음 표를 기다려.” 그녀는 정민서를 잠깐 보았다. 같은 표를 함께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구경만 하고 의견을 내는 것 말고, 한 번은 만드는 쪽에 서 보고 싶었어.”

두 사람의 시선이 정민서에게 갔다.

정민서는 한참 창밖을 보았다. 유리에 붙어 있던 빗방울 하나가 아래로 내려가다가, 다른 물방울과 만나 길을 바꿨다.

“제 일은 틀린 것을 찾는 겁니다.”

그녀가 말했다.

“모델이 어디서 사람과 다르게 굴었는지. 그런데 이 년을 하고 나니, 다른 건 다 찾아지는데 하나가 안 찾아집니다. 어디서부터 다른가. 다른 것이 시작되는 자리요.”

“그걸 보고 싶어서?”

“그걸 보고 싶어서입니다.”

세 개의 이유가 탁자 위에 놓였다. 아무도 그것을 문서에 적지 않았다. 적을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셋 다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붙여야 해.”

조르두가 말했다. “지난주에 물은 거.”

“뭐라고 부르지, 였지.” 이스텔라가 고쳐 말했다. “부르는 것과 이름은 달라.”

“본 프로젝트는 다들 A라고 부르잖아.”

정민서가 말했다. 회사의 모든 문서에서 그 프로젝트는 철자 하나로 불렸다. 처음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가장 앞에 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이건 B네.”

조르두가 가볍게 말했고, 이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라서?”

“두 번째라서.”

“영어로는 그냥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이스텔라가 연필 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것.”

정민서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어릴 적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말할지 잠깐 망설였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명이라고,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어요. 일부러 하찮게 지었습니다. 개똥이, 소똥이, 간난이. 귀한 이름을 주면 나쁜 것이 데려간다고 믿었죠. 무사히 자라는지 본 뒤에야 제 이름을 주었습니다.”

“너도 있었어?”

이스텔라가 물었다. 정민서는 조금 웃었다. 회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지어 주셨습니다. 일곱 살까지는 그걸로 불렸어요. 뭐였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르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회의실에서 웃는 것을 정민서는 처음 보았다.

“그럼 B는 아명이네.”

“네. 무사히 자라면, 그때 제 이름을.”

“누가 지어 주는데?”

조르두가 물었다. 정민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스텔라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은 탁자 가운데에 놓인 채로 있었다.

조르두가 문서 맨 위의 제목 칸을 눌렀다. 아직 제목 없음이었다. 그는 노트북을 이스텔라 쪽으로 밀었다. 이스텔라는 그것을 정민서 쪽으로 밀었다. 지난주의 세 칸과는 반대 순서였다.

정민서는 제목 칸에 글자 하나를 쳤다. 제목이라 화면은 그 글자를 본문보다 훨씬 크게 띄웠다. 그 옆이 비어 있어서 더 커 보였다.

세 사람은 그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이름이 더 크네요.”

정민서가 말했다. 문서 안에 든 것은 여섯 쪽이었다. 글자는 그보다 컸다.

회의실 벽에는 선반이 하나 있었다. 지난해 행사에서 쓰고 남은 안내 책자 상자와, 아무도 찾지 않는 명함꽂이와, 말라 버린 화분이 올라 있었다.

이스텔라가 화분을 내렸다. 정민서가 상자를 복도로 내갔다. 조르두는 명함꽂이를 들고 잠깐 들여다보다가, 그것만은 자기 가방에 넣었다. 예전 동료들의 명함이 꽂혀 있었다.

빈 선반에 회색 노트북이 올라갔다. 그 옆에 이스텔라가 종이들을 모아 온 파일 하나. 그 옆은 비었다.

나가기 전에 조르두가 복도에서 의자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세 의자 사이에, 창 쪽을 향하도록 놓았다. 네 개의 의자가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부르면 대답하는 것하고, 거기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르지.”

이스텔라가 문가에서 말했다. 네 번째 의자를 보면서였다.

조르두는 불을 끄려다 멈췄다. 창밖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유리에는 물자국 몇 줄이 갈라진 길들로 남아 있었다.

이날 정한 것 — 문서, 제목 칸

부르는 이름은 B. 아명이다. 제 이름은 무사히 자란 뒤에. 누가 지어 주는지는 아직 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유는 문서에 적지 않는다.

회색 노트북은 선반에 둔다. 의자는 넷.

남은 물음: 부르면 대답하는 것과 거기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제목 칸에 글자 하나가 생겼다.

글자는 컸다. 그 아래의 여섯 쪽보다 컸다. 그러나 그 글자를 제 것으로 듣는 쪽은 없었다. 이름은 부르는 쪽에만 있었다. 불리는 쪽은 아직 없었다.

선반 위에서 회색 노트북은 꺼져 있었다. 그 옆의 빈자리, 그리고 네 번째 의자. 자리들이 먼저 생기고 있었다. 무엇이 앉을지 모르는 자리들이. 안도 밖도 아직 없었지만, 바깥에는 이제 무언가를 둘러싼 것들이 있었다. 둘러싸인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