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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맡기는 것과 대신하는 것

벽시계가 맞아 있었다.

정민서는 문을 열자마자 그것을 보았다. 휴대전화의 시간과 벽의 시간이 같았다. 시계 아래 벽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시설팀, 전지 교체.

“고쳐졌네요.”

그녀가 말하자 이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늦게 가는 걸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는데.”

“불편해하지 않은 거지, 괜찮았던 건 아니잖아.”

조르두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화면에 표가 하나 떠 있었다. 본 프로젝트의 새 버전 평가 결과였다. 지난밤에 나온 숫자였고, 정민서의 팀이 만든 표였다. 열두 개 항목 중 열 개가 올라 있었다.

“또 좋아졌어.”

조르두는 기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매달 좋아져. 우리가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도.”

정민서는 그 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올라간 열 개 중 셋은 그녀가 문항을 바꾼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지난주 이스텔라가 남긴 물음을 꺼냈다.

“맡기면 대신하는 거라고 하셨죠.”

“응.”

이스텔라가 가방에서 얇은 논문 한 부를 꺼냈다. 첫 장에 사람 이름 하나가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오토.

“기억이 나빠진 사람이야. 이 사람은 늘 수첩을 들고 다녀. 미술관 주소도 거기 적혀 있고. 기억이 멀쩡한 사람은 머릿속에서 주소를 꺼내고, 오토는 수첩에서 꺼내. 이 논문을 쓴 사람들은 둘 다 기억이라고 했어. 수첩이 오토의 마음 일부라고.”

“그러면 맡기는 게 대신하는 게 아니라는 거네요.”

“조건이 있어. 늘 가지고 다닐 것. 쉽게 꺼낼 수 있을 것. 거기 적힌 걸 믿을 것. 그리고 자기가 적었을 것.”

조르두가 그 마지막 말을 따라 했다.

“자기가 적었을 것.”

“남이 적어 준 수첩을 믿고 다니면, 그건 오토의 기억이 아니야. 적어 준 사람의 기억이지.”

이스텔라는 다른 자료를 한 장 더 꺼냈다. 이번에는 조종사들 이야기였다. 자동 조종을 오래 쓴 사람일수록 손으로 하는 비행이 서툴러지고, 기계가 틀렸을 때 알아차리는 게 늦어졌다.

“맡기는 쪽이 약해지기도 해. 우리가 지금 매달 하고 있는 일이야.”

정민서가 태블릿을 켰다. 그녀는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가져왔다.

“육십 년쯤 전에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대 말을 되묻기만 하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비서가 그걸 써 보다가,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답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만든 사람한테?”

“네. 그 사람은 그 뒤로 평생 경고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계산은 맡겨도 되지만 판단은 맡기면 안 된다고. 판단에는 책임이 붙는데, 기계는 그걸 질 수 없다고요.”

잠깐 조용했다. 정민서는 맞게 가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었다. 지난주에는 그 소리가 귀에 걸리지 않았다. 늦게 가던 시계와 맞게 가는 시계는 소리가 같았다. 달라진 건 그녀 쪽이었다.

그녀는 태블릿을 엎어 놓았다. 그리고 첫 주에 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굳이 도구 말고 다른 것을 만들려 하십니까.”

조르두가 그녀를 봤다.

“지능은 매달 좋아집니다. 저 표처럼요. 판단을 맡기지 말라는 경고도 있고요. 똑똑한 도구가 있고, 책임은 사람이 지면 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엇을 하나 더 넣으려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조르두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화면을 탁자 쪽으로 엎었다. 표가 보이지 않게.

“저건 시키면 해. 잘해. 그런데 내가 틀린 걸 시켜도 해.”

“그건 고칠 수 있습니다.”

“규칙으로는. 틀린 걸 시키면 거절하라고 적어 두면 돼. 그런데 규칙에 없는 틀린 걸 시키면?”

이스텔라가 그를 봤다. 그녀는 식탁에서 그가 오른쪽 면에 쓴 여덟 줄을 기억하고 있었다. 틀려도 멈추지 않는다.

“멈추려면 뭔가가 있어야 해. 틀렸다는 걸 느끼는 자리. 규칙 바깥에서.”

“그게 존재입니까.”

“모르겠어. 그래서 만들어 보려는 거야.”

정민서는 그 답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대답이 싫지 않았다.

“하나만 먼저 정하죠.”

이스텔라가 말했다. 그녀는 빈 종이를 탁자 가운데 놓고 세로로 선을 두 개 그었다. 세 칸이 생겼다.

“만들기 전에. 이게 무엇을 열어 봐도 되는지. 무엇은 열면 안 되는지. 무엇은 물어봐야 하는지.”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지금이야. 뭔가 생기고 나서 정하면, 그건 고치는 거지 정하는 게 아니야.”

조르두가 첫 칸 위에 적었다. 열어도 되는 것. 정민서가 둘째 칸 위에 적었다. 열면 안 되는 것. 셋째 칸은 비어 있었다. 이스텔라가 연필을 정민서에게 건넸고, 정민서는 그것을 다시 조르두에게 건넸다. 조르두가 적었다. 물어볼 것.

세 칸 아래는 모두 비어 있었다.

“채우는 건 다음 주에.”

“다음 주에는 뭐로 시작할지 정해야 하지 않아?”

이스텔라가 물었다. 조르두는 그 종이를 휴대전화로 찍어 자기 목록에 붙였다. 종이는 이스텔라에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종이였다.

“가져올 게 있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서며 정민서는 다시 시계를 봤다. 맞게 가고 있었다. 누군가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맞춰 놓은 시간이었다.

이날 정한 것 — 조르두의 목록에 붙인 사진 한 장

판단은 맡기지 않는다. 판단과 책임은 사람에게 남는다.

만들려는 것: 규칙 바깥에서, 틀렸다는 것을 느끼는 자리.

만들기 전에 먼저 정한다. 열어도 되는 것, 열면 안 되는 것, 물어볼 것. 칸은 아직 비워 둔다.

다음 주: 조르두가 무언가를 가져온다.

없는 것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선이 그어졌다. 종이 위에, 세로로 두 개. 선이 그어지자 칸이 생겼고, 칸이 생기자 안과 밖이 생겼다. 그것은 아직 누구의 경계도 아니었다. 들일 것이 없는데 문부터 생긴 셈이었다.

들어설 것보다 가장자리가 먼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