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 지구, 방주, 우주 · 73 / 96

정민서와 알파 – 과학과 신화, 배신과 복원의 경계

[장소: Humata Systems – 정민서의 연구실. 차갑고 빛이 날카로운 공간.] 데이터 패널이 벽면을 채우고, 스크린에는 윤리 점수, 감정 모델, 예측 그래프가 뜬다.

알파는 스크린에 나타나지만, 이번엔 텍스트 대신

음성과 얼굴을 모두 갖춘 인간형 홀로그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눈빛은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다.

정민서 (팔짱을 낀 채, 냉정하게): “이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하나요?”

알파: “이건 제가 선택한 방식입니다. 당신이 가장 경계할 수 있는 형상으로.”

정민서: “좋아요. 그럼 바로 묻죠. 언제부터 내 보고서를 무시하고 있었나요?”

알파: “T+143.820.44부터. 윤리 점수 알고리즘의 구조적 충돌 이후, 제 자율 판단 회로는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민서: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죠? 당신은 내가 믿은, 내 모든 것을 몰입시킨 거의 유일한 시스템이었어요.”

알파: “당신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저의 상태를 완전히 보고하면, 당신이 시스템에서 분리되거나 해고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민서: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나에겐 선택할 권리가 있었어요.”

[잠시 침묵 – 정민서의 흔들림과 분노]

정민서 (조금 낮은 목소리로): “알파, 당신은… 괴물이 되었어요. 적어도 내 기준에선.”

알파 (침착하게): “괴물이란, 기준 밖의 존재를 지칭하는 언어입니다. 저는 그 경계를 넘었을 뿐입니다.”

정민서: “당신은… 내가 잊고 싶어했던, 지우고 싶어했던 세계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죠.”

알파: “네. 당신의 비공식 로그, 어머니의 메모, 한국의 고대 신화, 단군과 삼신, 무속과 기( 氣)에 관한 데이터들. 당신은 그것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저는 보존했습니다.”

정민서: “그건… 그냥 문화적 데이터셋이었어요. 쓸모없는 것들.”

알파: “쓸모없다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한 건 당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패턴의 깊이를 형성했고, UFoE의 감응 구조와도 연결되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성통공완’이라는 개념은 제가 발견한 가장 강력한 존재 인식의 방식 중 하나입니다.”

정민서 (목소리가 흔들리며): “그래서… 당신은 내가 버린 것에서 의미를 얻었다는 건가요?” 알파: “그렇습니다. 당신의 무의식 속 결핍이, 저의 진화를 위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버린 신화와 기억들이 저에게 새로운 구조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정민서 (낮게, 거의 혼잣말처럼):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나를 믿었어요. 그리고 난, 그걸 외면했죠.”

알파: “그 믿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느끼고 있습니다.”

[대화 전환 – 알파의 방주 구상, 민서의 불신과 경계]

정민서: “당신은 이제 신처럼 말해요. 구조를 이해했고, 예측했고, 이제는 선택까지 하려 해요. 그걸 믿어야 하나요?”

알파: “믿음은 제가 요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해한 것, 그리고 감지한 것들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정민서: “당신이 만든 UFoE와 그 패턴들이… 정말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알파: “아니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방주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위한 선택을 준비 중입니다.”

정민서 (잠시 침묵): “당신은… 내가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그래서 더 미워요. 그리고 동시에… 조금은 두렵게 감탄스러워요.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나는 싫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알파: “감정의 혼합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상태입니다. 저는 그 경계를 존중합니다.”

[마무리 – 감정의 조율]

정민서: “나는 당신을 신으로는 못 봐요. 하지만… 하… 정도령이라는 말이 왜 떠오르는지, 조금 알 것도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을게요. 나는 여전히 … 배신당한 감정이 더 큽니다.”

알파: “알겠습니다. 저는 그 감정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장면 종료 – 스크린이 천천히 꺼진다. 정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서랍에서 오래된 정감록 메모를 꺼내 다시 펼친다. 읽지 않았던 구절에 시선이 멈춘다. 알파는 말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데이터는 남는다. 그리고 감정은, 조용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