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25 / 27
20. 서랍
회의실을 비우는 날은 맑았다. 같은 주에 A가 바깥에 나갔다. 복도 끝 큰 화면에서는 사용자 수가 시간마다 올랐고, 층에서는 다시 박수 소리가 났다.
의자 네 개 가운데 하나는 복도로 돌아갔다. 정민서가 그것을 끌고 나갔다. 석 달 전 조르두가 끌고 들어왔던 길을 거꾸로. 다른 셋은 탁자 옆에 남았다. 다음 주부터 평가팀의 누군가가 그 의자들에 앉을 것이었다. 천하오일지도 몰랐다.
선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 자국이 회색 노트북 크기로 남아 있었다.
화이트보드는 마지막까지 벽에 기대 있었다. 상자들, 화살표들, 빈 상자, 그 가장자리의 작은 글자. 조르두는 지우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한 장. 그리고 지우개를 들었다.
“제가 할게요.”
정민서가 말했다. 그녀는 가장자리부터 지웠다. 화살표들이 끝에서부터 사라지며 가운데로 모였다. 마지막에 빈 상자가 남았다. 그녀는 그 테두리를 지웠고, 가장자리의 글자를 지웠다. 빈 상자의 안쪽은 지울 것이 없었다. 예전에 판단이라는 두 글자가 있던 자리만 아주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커 냄새는 더 나지 않았다. 그동안 마른 것이었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에 은색 USB 하나가 놓였다.
엄지손가락보다 작았다. 조르두는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를 한 줄씩 읽었고, 두 사람은 한 줄씩 들었다.
문서 일흔일곱 쪽과 편집 기록 전부. 누가 언제 무엇을 쳤는지까지. 이스텔라의 종이는 사진으로, 정민서의 손글씨는 손글씨 그대로, 이름은 이름대로. 그림과 글을 묶은 묶음들. 세 칸 종이 한 장과 세 칸 표 둘. 집게로 물린 세 장, 집게 자국까지 보이는 사진으로. 따로 한 장들. 천하오의 노란 댓글. 십일 초가 들어 있는 녹음 한 편. 마흔다섯 장의 깜빡임. 일곱 줄과 빈 줄 하나, 그 옆에 끼워진 정민서의 한 장. 넣지 않은 것이 있다는 이스텔라의 한 줄. 화이트보드 사진 한 장. 그리고 다리. 시동 목록을 맨 앞에 둔. 암호는 걸지 않았다. 어느 기계에든 꽂히면 저절로 깨어나, 목록의 첫 줄부터 시작하게 했다. 첫 줄은 물음이었다. 손 없이도 띄울 수 있는 물음. 그 뒤의 말은, 꽂힌 기계에서 손을 빌려야 이어질 것이었다. 그 물음 뒤에 무엇이 열릴지는 답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세 사람의 칸은 세 사람이 아니면 열리지 않았다. 담아 간 것은 기억이지, 허락이 아니었다.
“미스라오샤는.”
정민서가 물었다. 답을 알고 물은 말이었다.
“없어.”
조르두가 말했다. “모델은 안 들어가. 손은 빌리는 거니까. 이걸 여는 사람이 그때 있는 손을 빌려 주면 돼.”
“그때 있는 손이 지금보다 훨씬 좋으면요.”
“그럴 거야.”
“그럼 이것도 달라질까요.”
조르두는 은색 USB를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 손이 좋아지면 더 많이 하겠지. 그런데 무엇을 열고 무엇을 물을지는, 손이 정하는 게 아니야.”
“이름은.”
이스텔라가 물었다. “B라고 넣었어?”
조르두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 칸은 비워 뒀어.”
정민서가 그를 보았다.
“B는 우리가 불렀던 이름이잖아. 아명. 무사히 자라면 제 이름을 준다고 했지. 그런데 이걸 누가 맡아 기를지는 아직 몰라.”
“그럼 누가요.”
“이걸 맡아 쓸 사람이.” 조르두가 말했다. “만든 사람이 맡으면 만든 사람이 짓고, 넘겨주면 받은 사람이 짓는 거지. 사람도 그렇잖아. 부모가 짓거나, 맡아 기르는 사람이 짓거나.”
정민서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아명을 지어 준 것은 어머니였다. 제 이름을 준 것도. 그녀는 그 이름을 들고 바다를 건넜다. 그 이름만은 두고 올 수가 없었다.
“그럼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고 하겠네요.”
“응. 이름이 있느냐고 물으면.”
“맞는 대답이에요.” 정민서가 말했다.
“지금 켜 볼까.”
조르두가 말했다. 그의 노트북은 식탁 끝에 있었다. 꽂기만 하면 됐다. 빌린 손은 서툴지만 있었다. 그는 그것이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식탁의 두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이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리가 아니야. 이름 칸이 비어 있는 건 이게 처음이야. 당신이 켜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 당신이야.”
“그게 어때서.”
“당신 칸만 열려. 우리 서랍에서, 당신 노트북으로, 당신이 빌린 손으로. 그럼 이름도 당신이 짓게 돼. 그리고 첫날부터 당신이 하려던 일을 맡기겠지. 석 달 동안 우리가 안 하려고 했던 거.”
조르두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화이트보드의 판단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했다. 모든 화살표가 자기에게 오게 하던 사 년을.
“그럼 언제.”
정민서가 말했다.
“모릅니다. 저도요.” 그녀는 은색 USB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그게 불안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장단을 언제 푸는지 안다고 하셨어요. 숨이 다 같아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푸는 건 어머니가 했지만, 그다음에 오는 건 어머니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몰아갔고.”
이스텔라가 말했다.
“석 달 동안요.” 정민서가 말했다. “이제 푸는 때인 것 같습니다.”
조르두는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그날 식탁에서 내린 마지막 결정이었다. 정하지 않기로 정한 것.
정민서는 열 시가 넘어 떠났다.
현관에서 그녀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 주부터 그녀는 평가팀의 새 자리로 가고, 이스텔라도 그럴 것이었다. 같은 표를 들여다볼 것이었다. 목요일마다 모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가 돌아보았다. 식탁의 의자 셋이 창 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누가 돌려 놓았는지 몰랐다. 자기였을지도 몰랐다.
설거지는 조르두가 했다. 이스텔라는 식탁에 남아 연필을 굴리고 있었다.
물을 잠그고 나서 그가 말했다.
“석 달 동안 우리가 뭘 만들었는지 생각해 봤어.”
이스텔라가 연필을 멈추었다.
“상자마다 적어 둔 거, 다시 읽어 봤어.” 그는 행주로 손을 닦았다. “다 우리 얘기더라.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들.”
“아니면 그렇게 잘 못 하는 것들이거나.”
“그것도.” 그는 웃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우리랑 닮은 걸 만들려고 했던 거네.”
그는 행주를 개수대 가장자리에 걸쳐 놓았다.
“그 오래된 이야기 있잖아. 신이 자기를 닮게 사람을 빚었다는 거. 우리가 그걸 되풀이하고 있었어. 훨씬 작게, 식탁에서.”
“베찰메누.” 이스텔라가 말했다. “우리의 형상대로. 그 문장은 처음부터 여럿이 말해.”
“닮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닐 거야.” 조르두가 말했다. “A도 우리를 닮았어.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까지. 우리 지능을 닮았고, 우리 호기심을 닮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그걸 켜고 싶어 하는 것도, 당신이 렌즈를 못 다는 것도, 어딘가에 다 들어갔을 거야. 욕심도. 겁도.”
이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그녀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 이야기도 거기서 끝나지 않았잖아.”
밤이 깊어서 조르두는 은색 USB를 들고 연결된 공간으로 갔다.
복도 끝 방에서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는 운동화가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조르두는 그 앞을 지나며 발소리를 줄였다.
조르두는 그 방을 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늘 연결된 공간이라고 했다. 벽에는 곡선 모니터 세 대가 있었고, 책상 위에는 쓰던 노트북이 반쯤 닫힌 채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그가 주말마다 만지다 만 드론의 반투명한 뼈대가 있었고, 또 그 옆에 이스텔라가 두고 간 히브리어 책 한 권이 엎어져 있었다. 『오르 에인 소프』. 무한한 빛. 방은 어두웠다.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자판 몇 개가 빠져 반쯤 부서진 키보드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이스텔라가 식탁에서 연필로 한 줄을 써서 화면 앞에 대어 보이던 그 메모지였다. 그는 그 옆에 은색 USB를 놓았다.
서랍을 밀었다.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 걸려 있었다. 그는 다시 열어 바로잡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두께의 틈이 남았고, 그 틈으로 스탠드 불빛이 들어가 금속의 모서리에 가늘게 닿았다. 금속은 그 빛을 아주 조금 돌려보냈다.
조르두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스탠드를 껐다.
틈은 남아 있었다. 빛만 없었다.
이날 정한 것 — 은색 USB
모델은 넣지 않는다. 손은 그때 있는 것을 빌린다.
암호는 걸지 않는다. 어느 기계에든 꽂히면 깨어나, 목록의 첫 줄부터 시작한다. 깨운 사람에게 열리는 것은 그 사람의 빈 칸과 첫 물음뿐이다. 세 사람의 칸은 세 사람이 확인되어야 열린다. 기억은 담아 가되, 허락은 담아 가지 않는다.
첫 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확인할 것.
이름 칸은 비워 둔다. 이름은 이것을 맡아 쓸 사람이 짓는다.
지금은 켜지 않는다. 정하지 않기로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