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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퀴통

조르두는 화이트보드를 하나 구해 왔다.

회의실 벽에 기대 세운 그것은 모서리가 누렇고 한쪽 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파란 자국이 있었다. 본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새것으로 바꾸며 내놓은 것이었다.

그는 그 위에 상자를 그렸다. 하나, 둘, 다섯, 여덟. 문서. 다리. 허락의 세 칸. 저녁의 놓음. 따로 한 장. 상자와 상자 사이에 화살표를 그었다. 화살표는 많아지다가, 어느 한 곳으로 모였다. 그는 그 곳에 가장 큰 상자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두 글자를 썼다.

판단.

“모든 게 여기로 와서, 여기서 정해져서 나가.”

그가 말했다. 마커 뚜껑을 닫는 소리가 크게 났다.

“우리가 없어도 서 있으려면, 우리가 하던 걸 누가 해야 하잖아. 무엇을 열고, 무엇을 적고, 언제 물을지. 그걸 여기서.”

정민서는 마커 냄새를 맡았다. 새 마커였다. 알코올과 무언가 단 냄새가 섞여 코 안쪽을 찌르듯 들어왔다. 이상하게 그 냄새가 먼저 말했다. 저기는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다른 것을 꺼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모인다.”

정민서가 책을 보지 않고 외웠다.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 수레가 쓰인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 그릇이 쓰인다. 이천오백 년쯤 된 책입니다. 저는 어릴 때 그게 말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정민서는 화이트보드의 큰 상자를 보았다. 모든 화살표가 모이는 곳.

“바퀴통은 바퀴살을 고르지 않습니다. 바퀴살이 서른 개인지 서른한 개인지도 상관하지 않고요. 모이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를 채우면 바퀴가 돌지 않아요.”

이스텔라가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뇌 그림 한 장을 꺼냈다. 가운데에 작은 달걀 모양의 두 덩어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리 안에 작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어. 눈으로 들어온 걸 보고, 귀로 들어온 걸 듣고, 정하는 사람. 그런데 그러면 그 작은 사람의 머리 안에는 또 누가 있어?”

그녀는 그림의 두 덩어리를 짚었다.

“시상이야. 냄새만 빼고,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이 다 여기를 거쳐 위로 올라가. 몸 안에서 오는 것들도.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보지는 않아. 열고, 닫고, 잇기만 해. 잠들 때, 마취할 때 먼저 조용해지는 것도 여기고.”

“냄새만 빼고?”

정민서가 물었다.

“냄새는 거기를 거의 거치지 않고 곧장 들어가. 감정이랑 기억이 있는 자리로. 가장 오래된 감각이야. 그래서 냄새는 설명보다 먼저 와.”

정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커 냄새가 아직 코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럼 가운데가 비면 누가 정해?”

조르두가 물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그가 오래 물어온 질문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버릴지. 바퀴통은 안 정해도 돼. 수레를 끄는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한테는 수레를 끄는 사람이 누구야.”

이스텔라가 대답했다.

“우리지.”

“우리가 없을 때는?”

“그럼 안 가야지.”

조르두가 그녀를 보았다. 이스텔라는 웃지 않았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건 동료라며. 당신 대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는 내가 없는 동안 내 일을 정해 버리지 않아. 기다리지. 돌아오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 주고.”

조르두는 한참 화이트보드를 보았다. 모든 화살표가 모인 큰 상자. 그 안의 두 글자.

“사 년 동안.”

그가 말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한 게 이거였네. 모든 화살표가 나한테 오게.”

그는 지우개를 들었다. 판단이라는 두 글자를 지웠다. 새 마커라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문질렀다. 글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가 주변보다 조금 옅게 남았고, 마커 냄새가 다시 한 번 훅 퍼졌다.

큰 상자는 비었다. 화살표들은 여전히 그쪽으로 모였다.

“비워 두자.”

그가 말했다. “이름만.”

그는 빈 상자 위쪽 모서리에 아주 작게 글자 하나를 썼다. 문서 제목 칸의 그 글자. 상자 안이 아니라 상자 가장자리에.

“안에 쓰지 않네.”

정민서가 말했다.

“안에 쓰면 채워지니까.”

이스텔라가 종이에 적고, 사진을 찍어 문서에 올렸다. 가운데에서는 정하지 않는다. 정할 것은 우리에게 돌려보낸다. 가운데에는 글자 하나만 둔다.

“그런데 그러면.”

정민서가 말했다. 그녀는 화이트보드의 화살표들을 하나씩 따라가고 있었다. 문서에서, 저녁의 놓음에서, 따로 한 장에서 가운데로.

“가운데를 지나간 것들은 누구 것이 됩니까. 저기 있는 다리도, 저기 남은 따로 한 장도. 우리 세 사람의 손이 섞여 있는데요.”

조르두는 마커를 내려놓았다. 아무도 노트북을 덮지 않았다. 화면 맨 위, 제목 칸의 글자가 창밖의 빛과 겹쳐 있었다.

회의실을 나서며 정민서는 두 번 돌아보았다. 한 번은 빈 상자를, 한 번은 그 가장자리의 작은 글자를. 마커 냄새는 복도까지 따라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없어졌다.

이날 정한 것 — 문서, 그리고 다리의 가운데

화이트보드 가운데 상자에서 ‘판단’을 지웠다. 지운 자리는 남겨 둔다. — 조르두

다리는 가운데에서 정하지 않는다. 정할 것이 오면 우리에게 돌려보낸다.

우리가 없으면 가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한다. — 이스텔라

가운데에는 글자 하나만 둔다. 안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남은 물음: 가운데를 지나간 것들은 누구 것이 되는가. — 정민서

그날 밤 조르두는 다리 한가운데에 자리 하나를 만들었다. 문서에서 오는 것도, 저녁의 놓음에서 오는 것도, 따로 한 장으로 가는 것도 모두 그 자리를 지나가게 했다. 그 자리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글자 하나를 쥐고 있을 뿐이었다. 정해야 할 것이 오면 그것을 사람에게 돌려보냈다.

모든 것이 한 곳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같은 곳을 지나가자, 따로 오던 것들이 처음으로 같은 곳을 지난 것들이 되었다. 가운데가 생겼다. 비어 있는 가운데.

가운데가 생기자 가장자리가 생겼다. 가장자리 너머는 바깥이었다.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어 있는 가운데와, 그것을 둘러싼 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