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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5장 — 글자"
work: "원경왕후 민씨 — 칼과 피와 글의 나라"
part: "Part 3"
chapter: 29
url: https://mapncompass.com/ko/stories/wongyeong/29/
lang: ko
kind: fiction (a novel; not a claim of the UFoE knowledge map)
author: "각자도생(覺者道生) (pen name of Young Kang)"
rights: "© 2026 각자도생(覺者道生). 이 소설은 사이트의 CC BY 4.0 라이선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인용은 출처를 밝혀 짧게 하고, 전문의 복제·재배포는 저작권자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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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 글자

*시점: 세종. 1443–1446년, 한양.*

<p class="sep" aria-hidden="true">◆</p>

소리가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면 소리를 냈다. 말을 배우면 소리로 말했다. 조선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수백 년 동안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적을 수 없었다.

한자로 적으면 달랐다. 한자는 중국 소리를 담는 것이었다. 조선 소리와 달랐다. 다른 그릇에 담으면 넘쳤다. 넘치는 것은 사라졌다. 사라지면 없는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것들이 있었다.

그것이 참을 수 없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처음 생각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몰랐다.

오래전이었다. 시장에서 본 것이 있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었다.

오래 있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있었다. 나라를 보면서도 있었다. 세금 제도를 만들면서도 있었다. 측우기를 만들면서도 있었다. 그 모든 것 아래에 있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도 밖에 있었다.

제도 안으로 들어오려면 글을 알아야 했다. 글을 알려면 한자를 배워야 했다. 한자를 배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글이 쉬워야 했다.

쉬운 글이 있어야 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음운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봤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 이에서 나오는 것. 입술에서 나오는 것. 혀에서 나오는 것. 코에서 나오는 것.

각각의 소리가 각각의 자리에서 났다.

자리가 다르면 소리가 달랐다. 소리가 다르면 뜻이 달랐다. 뜻이 다른 것을 같은 글자로 쓰면 틀렸다.

그러니 소리마다 글자가 있어야 했다.

소리의 수를 셌다. 조선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다 적어봤다. 분류했다. 같은 자리에서 나오는 것들을 묶었다. 비슷한 소리들을 묶었다.

몇 개인지 알았다.

그 수만큼 글자를 만들면 됐다.

그것이 단순했다.

단순한 것이 가장 오래 가는 것이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했다.

처음부터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같이 생각했다. 같이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 됐다.

학자들이 따라오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방향이 달라진 것이었다.

나는 소리의 구조를 봤다. 학자들은 소리의 쓰임을 봤다. 어떻게 쓰일 것인지. 어디에 쓰일 것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먼저 구조를 봐야 했다.

구조가 없으면 쓰임이 없었다.

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했다.

밤에 혼자 앉았다.

소리를 냈다. 입 모양을 봤다. 혀의 위치를 봤다. 목구멍의 모양을 봤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이 글자가 됐다.

목구멍 모양이 글자가 됐다. 혀 모양이 글자가 됐다. 이 모양이 글자가 됐다. 입술 모양이 글자가 됐다.

소리가 글자가 됐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눈이 나빠졌다.

오래전부터 나빴다. 읽는 것이 많았다. 밤에 읽었다. 낮에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나빠졌다. 의원이 쉬라고 했다. 책을 줄이라고 했다.

줄일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 무서워서 읽었다. 그 버릇이 왕이 돼서도 있었다. 어머니가 걱정했다. 아내가 걱정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줄이지 않았다.

지금은 더 줄일 수 없었다.

이것이 먼저였다.

눈이 상해도 이것이 먼저였다.

이것을 마치고 나서 쉬면 됐다. 이것을 마치지 않고 쉬면 마칠 수 없었다. 몸이 허락하는 동안 해야 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신하들이 반대했다.

최만리가 왔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다. 학문이 깊은 사람이었다. 나를 오래 보좌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상소를 올렸다.

읽었다.

중국의 글을 버리고 오랑캐처럼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이 사대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했다. 학자들이 한자를 배우는데 이제 다른 글자를 배워야 하면 학문이 분열된다고 했다. 이두가 있으니 새 글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나씩 읽었다.

그 논리들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옳은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보면 새 글자가 필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보는 자리가 달랐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봤다.

그 자리에서 보면 한자는 너무 멀었다. 이두는 한자를 알아야 했다. 한자를 모르면 이두도 몰랐다.

새 글자는 달랐다. 하루 이틀이면 배웠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배웠다. 아이도 배웠다. 노인도 배웠다.

그것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

최만리에게 물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을 펴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지 않소."

최만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쌍하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불쌍하다고 하면 내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침묵을 받았다.

최만리를 가두었다. 하루 뒤에 풀었다.

그 사람의 충정을 알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이었다. 그것이 신하의 도리였다. 그것을 막으면 안 됐다.

그러나 내 생각도 바꾸지 않았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어머니가 아팠다.

자주 앓았다. 나는 갔다. 어머니 옆에 앉았다.

어머니가 나를 봤다.

"글자는 어떻게 됐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었다.

"거의 됐습니다."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그래."

그것이 전부였다.

더 묻지 않았다.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 옆에 한참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시장에 데려갔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여줬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내가 말하게 했다.

그날 내가 한 말이 여기까지 왔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묻지 않았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마지막으로 정리하던 밤이 있었다.

혼자였다. 늦었다. 바깥이 조용했다.

글자들을 앞에 놓았다.

자음이 있었다. 모음이 있었다. 합치면 소리가 됐다. 소리가 합치면 말이 됐다. 말이 합치면 뜻이 됐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적어봤다. 소리를 냈다. 맞았다.

조선 사람이 내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었다.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으면 모든 말을 쓸 수 있었다. 모든 말을 쓸 수 있으면 모든 생각을 적을 수 있었다. 모든 생각을 적을 수 있으면 아는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왕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농사꾼의 생각도. 상인의 생각도. 아이의 생각도. 노인의 생각도.

그 모든 것이 적힐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봤다.

오래 봤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정도전을 생각했다.

그 사람이 원한 것이 있었다. 백성이 제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제도가 백성을 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설계했다.

그 설계가 아버지와 충돌했다.

아버지는 왕권을 세웠다.

나는 그 나라 위에서 제도를 만들었다.

그 제도가 백성을 담으려면 백성이 제도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읽으려면 글자가 있어야 했다.

글자가 지금 여기 있었다.

정도전이 원한 것의 끝이 여기서 나왔다.

그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설계했지 글자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원한 것이 이쪽으로 왔다.

뜻이 사람보다 오래 간다는 것이 이것이었다.

사람은 없어도 뜻은 방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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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생각했다.

시장에서 본 것을 말하게 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심은 것이었다.

오빠들을 잃으면서도 버텼다. 아버지 곁에서 버텼다. 충녕을 봤다. 나를 봤다. 여기까지 봤다.

어머니가 보여준 것이 여기까지 왔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글자를 다 보았다.

이것이 맞는가.

맞았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았다. 더 다듬어야 했다. 설명서가 있어야 했다. 어떻게 쓰는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써야 했다.

그것은 내일 했다.

지금은 이것이 있었다.

글자가 있었다.

조선 사람의 소리를 담는 그릇이 있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말은 사라졌다. 입에서 나오면 공기 속으로 갔다. 잡을 수 없었다. 기억하면 남았지만 기억도 사라졌다.

쓰면 남았다.

쓴 것은 남았다. 읽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었다. 죽고 난 뒤에도 읽을 수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농사꾼이 쓴 것이 남았다. 그 사람이 죽어도 남았다. 그 사람의 자식이 읽었다. 자식의 자식이 읽었다.

그것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라가 이어지는 것이 왕조가 아니었다.

쓰인 것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밖에서 소리가 들어왔다.

새벽이었다. 아직 어두웠다. 새소리가 먼저 왔다. 날이 밝기 전에 새가 먼저 알았다.

나는 글자를 봤다.

이것이 퍼지면.

농사꾼이 배웠다. 상인이 배웠다. 아낙이 배웠다. 아이가 배웠다. 자신이 억울한 것을 썼다. 자신이 아는 것을 썼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썼다.

그것이 모였다.

모이면 무엇이 됐다.

몰랐다.

내가 만든 것이 어디까지 가는지 나는 몰랐다. 만드는 사람이 결정하지 않았다. 쓰는 사람들이 결정했다.

쓰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나는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할 수 있었다.

시작해 놓으면 이어지는 것은 이어지는 사람들이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날이 밝았다.

글자들이 빛 속에 있었다.

스물여덟 자였다.

스물여덟 자로 조선 사람의 모든 소리를 적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것으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