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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2편 3장 — 함주 막사. 1383년 가을."
work: "원경왕후 민씨 — 칼과 피와 글의 나라"
part: "Part 1"
chapter: 6
url: https://mapncompass.com/ko/stories/wongyeong/06/
lang: ko
kind: fiction (a novel; not a claim of the UFoE knowledge map)
author: "각자도생(覺者道生) (pen name of Young Kang)"
rights: "© 2026 각자도생(覺者道生). 이 소설은 사이트의 CC BY 4.0 라이선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인용은 출처를 밝혀 짧게 하고, 전문의 복제·재배포는 저작권자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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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3장 — 함주 막사. 1383년 가을.

<p class="sep" aria-hidden="true">◆</p>

선비가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별 기대가 없었다.

개경에서 오는 자들은 대개 두 종류였다. 치하하러 오는 자, 아니면 무언가를 얻으러 오는 자. 글 잘 쓰는 자들은 말이 많고 몸이 약했다. 내가 상대하기 불편한 종류였다.

이지란이 들어와 말했다.

"정도전이라 합니다. 봉화 출신. 성균관에 있다가 유배를 당한 자입니다. 9년 됐다고."

"9년."

"네. 전라도에서 시작해서 여기저기 떠돌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경기도 김포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직접 왔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김포에서 함주까지. 먼 길이었다. 유배 생활 9년에 그 길을 직접 왔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들여보내라."

<p class="sep" aria-hidden="true">◆</p>

처음 봤을 때 마른 사람이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다. 옷이 깨끗하지 않았다. 여러 날 길을 걸어온 사람의 몸이었다. 그런데 눈이 달랐다. 피곤한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본 눈이었다.

그는 예를 갖췄다. 형식이 반듯했다. 글 배운 사람이었다.

내가 자리를 권했다. 그가 앉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먼저 말하는 쪽이 용건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군영을 들어오면서 봤습니다."

"그래서."

"호령이 엄합니다. 병사들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무기가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나는 그를 봤다.

그 말이 왜적 얘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 자가 왜적을 치러 함주까지 왔을 리 없었다. 9년 유배를 한 선비가 왜적 격려를 하러 먼 길을 왔을 리 없었다.

"무슨 뜻이냐."

그가 잠깐 나를 봤다.

"동남방의 왜적을 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딴청이었다. 나는 알았다. 그도 내가 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서로 그냥 뒀다. 아직 그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도 들을 준비가 됐는지 몰랐다.

우리는 그날 밤 술을 마셨다.

그가 말을 많이 했다. 나는 들었다. 토지 얘기를 했다. 권문들이 땅을 어떻게 가져갔는지. 백성이 어떻게 도망치는지. 나라의 재정이 어떻게 비어가는지. 내가 동북면에서 몸으로 느낀 것들을 이 자는 언어로 갖고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몸이 아는데 말이 없던 것들이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그가 돌아가던 날 아침이었다.

군영 앞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 그가 거기 멈춰 섰다. 나는 그를 봤다. 그가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소나무 껍질을 조금 벗겼다. 거기에 무언가를 새겼다.

나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가 끝내고 돌아섰다.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이 없었다.

그가 길을 떠났다.

나는 한참 있다가 소나무로 걸어갔다. 새겨진 글자를 봤다. 한자였다. 다 읽지는 못했다. 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글은 느렸다.

이지란을 불렀다.

이지란이 읽었다. 소나무가 어느 해에 다시 볼지 모르지만 사람 사는 곳에서 따라가리라, 대략 그런 뜻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그 글자를 봤다.

소나무 껍질이 벗겨진 자리가 하얬다. 아직 마르지 않은 목질이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p class="sep" aria-hidden="true">◆</p>

그날 이후로 이지란이 물은 적이 없었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무언가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날 밤 그 자가 했던 말들이 가끔 생각났다. 자려고 누웠을 때. 무릎이 쑤실 때.

몸이 알고 있는데 말이 없던 것들.

그 자는 그 말을 갖고 있었다.